'왜 나를 사랑해?'
연애를 한번이라도 경험해봤다면, 꼭 들어봤을 법한 질문이다. 벌써부터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어떤 답변들을 하였는가? 흔히들 '모범답안'처럼 여겨지는 답변은, 대개 두루뭉실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 어느 누구도, '네 외모가 좋아서' 혹은 '네 사회적 지위와 건강한 신체가 좋아서'와 같은 답변은 하지 않는다. 물론 본인도 그런 답변은 해본 적이 없다.
‘건강한 신체’, ‘사회적 지위’와 같은 정량적인 지표들은 흔히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배울 점이 많아서’와 같은 완곡한 표현으로 대체되곤 한다. 좀 더 포괄적이고, 모범적이며, 질문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답변으로는 ‘그냥’이 있다. 답변자의 태도와 어조에 따라, 질문자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있다’는 만족감도 줄 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 알랭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중
상대방의 ‘외모’, ‘신체’를 사랑하는 것과,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바로 상대방을 ‘타자’로 바라보는 것과 ‘주체’로 바라보는 것의 차이다.
She와 Her, 주체와 타자 사이
- 영화 ‘그녀’의 한 장면
약 3개월 간의 엑사 활동이 끝나가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개인발표는 영화 ‘그녀’에 대한 발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소우주로서의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 말씀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자면,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대방을 ‘타자’에서 ‘주체’로 인정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영화 ‘그녀’의 원 제목은 ‘she’의 목적격인 ‘her’이다. ‘왜 제목이 목적격일까?’라는 질문을 달아보면, 상대방을 ‘타자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며, 역설적으로 ‘낭만적 테러리스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말이다.
상대방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자기만족의 수단으로써, 즉 타인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인지 모른다.
‘내 속에는 네가 한 조각 있고
그리고 난 그게 너무 고마워.
네가 어떤 사람이 되건, 네가 어디에 있건 사랑을 보낼게’
- 별거 중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그녀’ 중
본 소설은 주인공과 클로이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주인공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해피엔딩은 없다. 영화 ‘her’에서처럼, 주인공은 상대방을 덧없이 떠나보내고 만다. 본인도 소설의 엔딩을 볼 때, 이입되는 감정에 읽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 ‘주체로서의 상대에 대한 이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영화와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상대방을 떠나보냈을 때 최초로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다. 연인의 외도는 분명 맘 아픈 것이지만, 이에 대한 아픔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붙잡는 것은 ‘타자의 사랑’과 가깝기 때문이다.
‘행위의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와 소설은 모두 해피엔딩이다.
Essays in love
아이들이 아프고 나면, 한 뼘은 더 큰다는 말이 있다. Juyummy님의 리뷰처럼, 사랑은 앓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고, 언제 떠나갈지도 모르기에,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조차 못한 채 앓고 보낼 뿐이다. 한바탕 앓고 나면, ‘감정’은 ‘상대방을 주체로서 존중하는 행위’에 좀 더 가까워지곤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주체로 존중할 수 있는 나'로 성장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책의 원제는 ‘Essays in love’이다. 우리는 좀 더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너를 사랑하는가’ ‘너로서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